03
04

배경과 내용

 <하녀>는 1950년대의 전쟁으로 인한 생존 자체의 공포에서 막 벗어나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당시에 여성들은 경제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한 가정과 사회에 능동적인 주체로 도약하는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전까지는 여성들이 오직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벗어나 노동자 계급에 편승하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은 이전까지는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욕망과 감정을 일상 속에서 크고 작게 녹여내는 면모들을 보여준다.

 

 영화의 주인공인 양옥집의 남자 주인공(이하 남자’)은 방직 공장에서 직원들 피아노 가르치는 일을 한다. 음악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외적으로는 문화와 여유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기저에는 결국 철저한 자본주의적 계산이 전제되어있음이 러브 레터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남자는 자신의 부인을 통해 중상층의 삶을 누리기에 이러한 삶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정조, 도덕심에 대한 의식적 행동을 영화 초반에서 자주 취한다. 그는 자본주의적 대가가 없는 개인의 진심에는 냉철하지만, 그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레슨 개인 교습과 같은 일에는 적극적이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공장의 한 직원을 개인 교습하게 되면서 하녀를 소개받기에 이른다. 남자는 하녀의 거침없는 유혹에 갈등하면서도 끝내는 넘어가게 되고, 하녀는 임신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자의 부인은 하녀에게 낙태할 것을 회유하여 결국엔 하녀가 유산하게 된다. 그 뒤 가족들의 대우가 냉담해지자 하녀는 그 집의 아들을 죽이고서는 남자를 자신에게 달라고 말한다. 부인은 이에 대해 신고할 마음을 전혀 가지지 않고 하녀에게 남편을 내주기로 한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에는 하녀와 남자가 동반 자살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감상과 분석

① 이 영화에는 제한된 등장인물과 공간만이 등장한다.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대칭적인 구도의 여자들 그리고 그들의 특징들을 부각시켜줄 수 있는 아이들, 방직 공장의 여자들 등 최소한의 인원과 장소들이 등장한다. 감독이 흑백의 화면에 영화의 메시지를 충분히 담아내기 위해 가면, 장애를 가진 딸, , 쥐약, 피아노, 쳇바퀴 속의 다람쥐, 벽의 패턴 등 각종 미장센을 섬세하게 설정해놓아서 감상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남자는 초반에 수강생의 러브레터를 단숨에 마다하고 부인만을 생각했다는 점에서 가정에 충실한 근대의 남성상을 대변하고자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껏 억눌렀던 욕망이 하녀의 적나라하고 도발적인 유혹에 손쉽게 촉발된다는 점에서 이상과 괴리되는 현실적인 인물의 우유부단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인물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상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극중 남자의 모습은 사실 시대에 초월하여 상존하는 인물상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남자는 책임과 자유의 경계에 선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드러낸다. 한 가장으로서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이고, 와중 누군가에게 새로운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본능이자 욕망이다. 이 둘은 공존하기가 힘든 선택지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에 대해서는 포기를 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의 딜레마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 투영된 인간의 욕망은 비단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과거, 현재 나아가 미래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한 욕망을 지닌 인간에 반해 현실은 지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언제든 주인공 남자와 같이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 있다. 아마 인간은 평생을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속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에서 여러 매력적인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때론 쉽게 잊어버리기도 했던 자유와 책임이 조화를 이루는 삶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다.

 

하녀는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표현하면서 시대를 앞서는 적극적인 여성의 면모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이 노동자 계급에서 벗어나 중상위층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상층의 남자를 택한다. 우리나라 1960년대에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철저히 욕망대로 움직이는 모습은 분명 그 당시에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는 감독이 여성이 가진 주체성과 능동적인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점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녀의 삶에 대한 태도와 방식이 여성이 진정으로 사회에서 계급 상승을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하녀가 가지고자 하는 것은 중산층 수준의 부와 여유인데 이러한 자본을 남자의 부인처럼 스스로 쌓아가는 방식이 아닌 결국엔 순결과 맞바꾼 타인으로부터의 착취에 기인하는 것이 여성의 완전한 독립에 있어서는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하녀라는 워딩 자체에는 항상 누군가의 종속 하에 말과 행동을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을 꿈꾸기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불어 2010년의 하녀는 1960년대의 것보다 훨씬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는 여성이 사회에서 인식되고 소비되는 이미지가 어떠한가에 대해서 돌이켜보게 되었다. 영화가 현실의 전부는 아니지만 현실의 자명한 세태를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미루어봤을 때, 여성이 사회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선 아직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부분은 하녀가 정말 남자를 철저한 계급 상승의 수단으로만 이용했는가였다. 하녀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상층의 삶을 누리는 것이라면 그 남자가 아니어도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기생 아닌 기생을 하며 계급의 문턱을 지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마지막에는 결국 남자와 동반 자살을 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살 바에는 당신과 함께 죽겠어요.’라는 대사에는 그녀가 지위 상승을 이뤄낼 수 없었던 현실의 한계에 대한 한탄이 기저로 깔려있다. 또한 죽어서라도 남자를 가지겠다는 욕망 역시 담겨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짚어보면, 남자도 결국 부인의 자본에 편승하여 중상층의 삶을 누리는 처지라고 볼 수 있는데 부인을 떠난 남자를 계속해서 중상층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었다. 즉 하녀는 자본을 잃은 남자의 모습마저도 포용이 가능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녀의 행동들을 미루어보았을 때, 정말로 하녀가 남자에게 이성으로서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처음에는 지위 상승에 대한 야망으로 접근을 했지만, 하녀로서가 아닌 여자로서 한 남자를 대한 적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COMMENT